티스토리 뷰
목차
현존하는 약 3,000개 언어 중 고유의 사전을 보유한 언어는 단 20여 개뿐입니다. 그 목록에 한국어가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저는 그냥 넘기지 못하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영화 <말모이>를 보고 나서였습니다. 이 숫자 하나가 우리말을 지키려 했던 분들의 무게를 그 어떤 대사보다 선명하게 전해줬습니다.

일제강점기, 말을 빼앗긴다는 것의 의미
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의 탄압이라 하면 토지 수탈이나 강제 징용을 먼저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제가 영화를 보면서 새삼 실감한 건, 언어를 빼앗는 것이야말로 가장 교묘하고 잔인한 방식의 지배였다는 점입니다.
1930~40년대 일본은 이른바 민족말살통치를 내세웠습니다. 여기서 민족말살통치란 조선인의 언어·이름·문화를 강제로 일본식으로 바꿔 조선 민족의 정체성 자체를 지워버리려 한 식민지 동화 정책을 뜻합니다. 조선어 신문과 잡지에 폐간 명령이 떨어졌고, 공공장소에서 우리말을 쓰면 범죄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총독부가 조선어학회 사무실로 폐관 명령서를 보내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문서 한 장에 담긴 무게가 생각보다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냥 잡지 하나를 없애는 게 아니라, 우리말이 공식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마지막 통로를 막겠다는 선언이었으니까요.
그 압박 속에서 조선어학회는 표준어 공청회를 반드시 열어야 한다고 버팁니다. 표준어 공청회란 단순히 학자들끼리 단어를 고르는 자리가 아닙니다. 각 지역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특정 단어를 우리 모두의 말로 합의하는 과정, 즉 언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의식이었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저는 언어가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라는 걸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했습니다.
- 민족말살통치: 언어·이름·문화를 일본식으로 강제 전환한 식민 동화 정책
- 조선어 신문·잡지 폐간 명령으로 우리말의 공식 유통 경로 차단
- 표준어 공청회: 지역별 언어 사용자들의 합의를 통해 표준어를 확정하는 절차
- 우리말 사용 자체를 범죄로 규정해 일상에서도 조선어를 몰아낸 현실
조선어학회, 사전 하나를 만들기 위해 치른 것들
흔히 사전 편찬은 학자들의 조용한 작업실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제가 영화를 통해 확인한 현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어학회 안에서도 내부 갈등이 있었고, 동료를 의심해야 했으며, 누군가는 경찰에 끌려가면서도 자료를 지켰습니다.
영화 속 조선어학회는 사투리 수집만으로도 4~5년 이상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사투리란 단순한 지역 방언이 아니라, 그 지역 사람들이 수백 년에 걸쳐 다듬어온 생활 언어입니다. 한국 방언학적 관점에서 보면, 제주 방언처럼 다른 지역 화자가 거의 알아듣지 못하는 독립적인 언어 체계를 갖춘 사례도 있습니다(출처: 국립국어원). 조선어학회가 이 모든 사투리를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그건 학문적 완성도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말도, 어떤 지역도 우리 민족에서 빠져서는 안 된다는 선언이었습니다.
'말모이'라는 사전 이름 자체가 이미 그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모이란 '말을 모은다'는 순우리말로, 주시경 선생이 처음 시작했다가 중단된 우리말 사전 편찬 작업의 이름입니다. 조선어학회는 그 이름을 이어받아 다시 시작했고, 잡지 마지막 호의 광고 한 편으로 전국에 우리말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답장이 없어 조마조마했던 그 시간 끝에, 창고 가득 쌓인 전국 각지의 편지 묶음이 발견되는 장면은 제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울컥했던 순간이었습니다.
특히 신주 중학생들이 총독부에 넘기지 않고 학회로 직접 보냈다는 대목은 지금도 생각하면 목이 메입니다. 말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어른들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증거였으니까요.
한글의 위상, 지금 우리가 누리는 것의 무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립한 식민지 국가들 중 자국 언어를 온전히 회복한 나라는 우리나라가 거의 유일하다고 합니다. 이 문장을 영화 마지막 자막으로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싶었는데, 실제로 그렇지 않은 나라가 대부분이라는 게 더 놀라웠습니다.
제가 두 딸에게 한글을 가르치면서 느낀 건, 이 언어가 처음부터 '배우기 쉬운 문자'로 설계되었다는 점입니다. 훈민정음의 가획 원리를 살펴보면 이게 단순한 기호 체계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가획 원리란 기본 자음 획에 획을 더할수록 소리가 강해지는 방식으로 문자를 체계화한 설계 원칙으로, 알파벳처럼 단순 암기가 아니라 인체의 발음 기관 구조에서 출발한 과학적 접근입니다. 딸아이들에게 가르치면서 "왜 ㄱ 다음이 ㅋ이에요?"라는 질문에 이 원리를 설명해줬을 때, 아이들이 스스로 규칙을 발견하듯 따라오던 기억이 납니다. 그 순간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이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 무언가라는 걸 느꼈습니다.
최근 K-팝의 세계적 인기와 함께 한글의 위상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라는 애니메이션이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그 OST 곳곳에 한글 가사가 등장했습니다. 우리 대중가요 중간에 영어 가사가 들어오는 건 익숙한 풍경이었는데, 외국 대중가요 중간에 한글 가사가 나오는 건 감회가 전혀 달랐습니다. 이건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우리말이 세계 문화 시장에서 하나의 언어 브랜드로 자리 잡고 있다는 신호로 보입니다.
한국어의 음운론적 구조, 즉 자음과 모음의 결합 방식과 성조 없는 발음 체계는 외국어 학습자들이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발음 규칙을 익힐 수 있게 해줍니다(출처: 국립국어원 한국어 특성). 세종대왕이 설계한 문자가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전 세계 학습자들에게 검증받고 있는 셈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말모이 사전은 실제로 완성된 건가요?
A. 일반적으로 영화니까 해피엔딩으로 끝났을 거라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 역사도 극적입니다. 조선어학회가 편찬하던 원고는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압수되었다가, 광복 후 1945년 경성역 창고에서 기적적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그 원고를 바탕으로 1957년 <조선말 큰사전>이 완성되었습니다.
Q. 조선어학회 사건이란 정확히 어떤 사건인가요?
A. 1942년 일제가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투옥한 사건입니다. 여기서 치안유지법이란 일본이 반일 활동을 탄압하기 위해 만든 법으로, 사전 편찬 작업 자체를 독립운동으로 규정해 학자들을 범죄자로 만든 것입니다. 제 경험상, 이 사건을 알고 나면 사전이라는 물건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Q. 한국어가 고유 사전을 가진 20여 개 언어라는 게 사실인가요?
A. 네, 현존하는 약 3,000개 언어 중 독자적인 문자와 사전을 함께 보유한 언어는 20여 개 수준이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흔히 언어가 많으면 사전도 많을 거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문자 체계 없이 구전으로만 존재하는 언어가 훨씬 많습니다. 한국어가 그 소수 목록 안에 있다는 사실이, 영화를 보고 나서 단순한 수치 이상으로 느껴졌습니다.
Q. 표준어는 어떻게 정해지는 건가요?
A. 일반적으로 수도권 언어를 그냥 표준으로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정해진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 표준어 선정 과정은 훨씬 복잡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표준어는 국립국어원이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을 기준으로 삼되, 각 분야 전문가와의 공청회를 거쳐 결정합니다. 조선어학회가 일제 치하에서도 공청회를 고집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론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이다." 이 대사가 영화가 끝난 뒤에도 며칠 동안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저는 지금 이 글을 한글로 쓰고 있고, 딸아이들은 한글로 책을 읽고 꿈을 꿉니다. 그게 가능한 건 어떤 자리에서 묵묵히 버텼던 사람들 덕분이었습니다. 총을 든 독립운동만 독립운동이 아니었습니다. 단어 하나를 놓고 옳고 그름을 따졌던 그 작업 또한, 분명한 독립운동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영화 한 편이 역사를 설명하는 것보다, 가끔은 이렇게 극적인 이야기를 통해 그 무게를 실감하는 편이 더 오래 남기도 합니다. 우리말을 쓰면서 한번쯤 그 배경을 생각해보고 싶으신 분들이라면, 영화 말모이를 한 번 보시길 권합니다. 보고 나서 한동안은 한글이 다르게 보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