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처음 이 영화를 볼 때 저는 허봉구를 그냥 한심한 백수로만 봤습니다. 그런데 300원짜리 빨간 라이터 하나를 돌려받으려고 달리는 열차 위를 기어가는 장면을 보면서, 어느 순간 저 자신을 그 자리에 겹쳐놓고 있었습니다. 내 밥그릇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며 살아온 건 허봉구만이 아니었으니까요.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방식일반적으로 자존감(self-esteem)이 낮은 사람은 조용히 움츠러든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자존감이란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여기는 심리적 토대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자존감이 낮다는 게 꼭 수동적인 모습으로만 나타나지는 않더라고요. 허봉구가 딱 그 경우였습니다.영화 초반, 그는 이마로 땅콩을 깨고, 예비군 훈련에 가야 ..
솔직히 저는 토이 스토리가 3편에서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디가 "잘 가, 파트너"를 남기고 떠나는 장면에서 이미 이 시리즈의 마침표를 찍었다고 느꼈거든요. 그런데 1996년 사촌 누나에게 받은 영어 더빙 비디오 테이프 하나가 제 어린 시절을 통째로 바꿔놓은 것처럼, 5편도 결국 극장으로 저를 끌어당겼습니다. 이번엔 두 딸을 데리고요. 그리고 영화가 끝난 뒤, 이건 아이들을 위한 영화가 아니라는 걸 확신했습니다. 악역 없는 토이 스토리, 그래서 더 섬뜩했습니다일반적으로 토이 스토리 시리즈의 긴장감은 명확한 악역에서 나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편의 시드, 2편의 알과 스팅키 피트, 3편의 랏소까지 30년 동안 단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번 5편에는 그 악역이 없습니다. 그 자..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 '도가니'에서 가해 교사들이 받은 최종 선고는 집행유예였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분노보다 허탈함이 더 컸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집으로 날아온 우편물 한 장이 그 기억을 다시 불러왔습니다. 솜방망이 처벌이 만들어낸 현실일반적으로 영화는 현실을 과장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도가니만큼은 제 경험상 오히려 현실이 영화보다 더 참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의 배경인 광주 인화학교 사건은 실제로 수년간 지속된 아동 대상 성폭력 범죄였고, 최종적으로 가해자 상당수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습니다.여기서 집행유예란, 유죄는 인정되지만 일정 기간 동안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 형의 집행을 면제해주는 제도입니다. 쉽게 말해 실질적인 구금 없이 사회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제가 영화에서 가장..
고등학교 1학년, 강원도 평창 수련회에서 처음 트루먼 쇼를 봤습니다. 그때 느낀 건 단순한 영화적 감동이 아니었습니다. 진로도 모르고, 공부는 왜 해야 하는지도 몰랐던 그 시절의 저와 트루먼이 묘하게 겹쳐 보였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영화가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건, 아마 그 때문일 겁니다. 평창 수련회에서 처음 본 트루먼 쇼1998년 개봉한 트루먼 쇼는 태어나면서부터 리얼리티 쇼(Reality Show)의 주인공으로 설정된 남자, 트루먼 버뱅크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리얼리티 쇼란 일반인의 실제 일상을 가감 없이 촬영해 방송하는 프로그램 형식을 말하는데, 이 영화에서는 한 발 더 나아가 주인공 자신만 그 사실을 모른다는 설정이 핵심입니다.트루먼이 사는 씨헤이븐(Seahaven)은 달에서도..
권태기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한 가지 질문이 먼저 떠오릅니다. "처음엔 정말 그 사람이 싫었나?" 아마 아닐 겁니다. 2004년 개봉한 영화 은 바로 그 질문을 스크린 위에 펼쳐 놓습니다. 짐 캐리가 코미디 배우라는 선입견을 완전히 내려놓게 만든 작품이기도 했고, 제가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아내 생각이 먼저 났던 이유가 그것이었습니다. 짐 캐리라는 배우를 다시 보게 된 순간저는 어릴 때 비디오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동생과 함께 를 봤습니다. 그때의 짐 캐리는 그냥 얼굴 근육이 특이한 코미디 배우였습니다. , 를 거치면서 그는 완전히 코미디 장르의 아이콘으로 굳어졌고,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그러다 고등학교 1학년 극기훈련에서 를 봤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우스꽝스러운 표정 연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만 해도 저는 단종을 그저 비운의 왕, 조선 역사에서 가장 억울하게 스러진 인물 정도로만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두 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는 권력 싸움을 다룬 사극이 아니라, 밥 한 끼를 나눠 먹는 사람들의 이야기였으니까요. 계유정난, 그 이후를 주목한 영화의 역사적 배경제가 직접 겪어보니, 사극 영화를 볼 때 역사적 맥락을 조금만 알고 들어가면 몰입도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도 마찬가지였어요.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은 1453년,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의 왕위를 빼앗기 위해 일으킨 정치적 쿠데타입니다. 여기서 계유정난이란 단순한 권력 다툼을 넘어, 12세에 즉위한 어린 군주의 정통성을 조직적으로 무너뜨린 사건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