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정이 체결된 그 날 밤 10시, 효력이 발생하기 직전까지 병사들은 서로를 향해 총을 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장면 하나로 영화 '고지전'이 기존 한국전쟁 영화들과는 완전히 다른 결의 작품이라는 걸 직감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전쟁을 다룬 영화와는 다르게 영웅도 없고, 승리의 환호도 없이 끝나는 전쟁 영화. 그게 이 영화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습니다. 반전영화로서의 고지전 — 에록고지가 말하는 것영화 '고지전'의 배경인 '에록고지'는 실제 화살머리고지와 백마고지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가상의 장소입니다. 이 두 고지는 6.25전쟁 후반, 철의 삼각지대(평강·철원·김화)를 둘러싼 치열한 전투의 핵심 거점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어느 쪽도 빼앗길 수 없는 보급로의 목줄 같은 곳이었던 셈입니다.제가 이 영화를 ..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분단 영화치고 너무 따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 보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이 영화의 진짜 무게가 어디에 있는지를. 공동경비구역 JSA는 남북의 청년들이 총 대신 웃음을 나누다 끝내 비극으로 치닫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비극이 허구가 아니라 김훈 중위 사건으로 현실과 맞닿아 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저는 꽤 오랫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남북 청년의 우정, 그게 진짜 문제였다이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 중에는 "남북 청년들의 우정이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봤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드는 생각은 달랐습니다. 비현실적이어서 슬픈 게 아니라, 너무 현실적이어서 더 슬픈 이야기라는 거였습니다.영화 속 이..
살다 보면 "그때 그 선택만 없었더라면"이라는 생각이 문득 치고 올라올 때가 있습니다. 저도 몇 년 전 돌이키기 어려운 결정을 하고 나서 한동안 그 생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1999년 작 영화 은 바로 그 감정을 정면으로 건드립니다. 기차를 향해 "나 다시 돌아갈래"를 절규하는 장면은 우리나라 영화계의 역사적인 명장면으로 손꼽히며 이 장면 하나로, 영화가 끝난 뒤에도 며칠 동안 머릿속에서 그 장면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역순 구성이 '후회'라는 감정을 완성하는 방식영화는 2000년 현재의 김영호(설경구)가 강물에 뛰어들어 통곡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소풍 나온 사람들 속에서 홀로 절규하는 그 모습은 처음에는 그냥 이상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영화가 역순 구성, 즉 미래에서 과..
내 카카오톡 대화가 누군가에게 열람된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저는 몇 년 전 카카오톡 민간인 사찰 뉴스를 접했을 때 그 불쾌함과 두려움이 오래 남았습니다. 2011년 개봉한 영화 은 바로 그 경험을 1990년대 초반으로 끌어당겨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국군보안사령부가 천 명이 넘는 민간인을 조직적으로 감시한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보면서 내내 '이게 정말 불과 30년 전 이야기구나' 싶어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민간인 사찰, 영화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영화 은 허먼 멜빌의 해양 소설 제목을 차용했습니다. 거대하고 실체 없는 괴물을 쫓는다는 의미인데, 영화 속 기자들이 추적하는 대상이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권력 집단, 즉 '정부 위의 정부'가 언론·정계·사법부를 ..
솔직히 저는 황우석 박사 사건이 터졌을 때, 처음엔 제보자 쪽이 틀렸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러길 바랬습니다. 군 복무 중 야간 당직을 서다 우연히 틀어놓은 TV에서 "논문 사진이 조작됐다"는 뉴스가 흘러나왔을 때, 저는 그게 설마 사실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영화 '제보자'는 바로 그 사건의 이면, 즉 진실을 세상에 꺼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무너질 뻔했는지를 담고 있습니다. 언론사명감, 말은 쉽고 현실은 다릅니다일반적으로 언론인은 진실을 좇는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그리고 제 경험상 뉴스를 오래 지켜보면서 느낀 건 그게 얼마나 이상적인 말인지입니다.영화 속 윤민철 PD(박해일 역)는 불법 난자 매매 제보를 시작으로 이장환 박사의 줄기세포 논문 조작 의혹으로 파고..
현존하는 약 3,000개 언어 중 고유의 사전을 보유한 언어는 단 20여 개뿐입니다. 그 목록에 한국어가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제 가슴속에는 자부심이 가득차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영화 를 보고 나서였습니다. 이 숫자 하나가 우리말을 지키려 했던 분들의 무게를 그 어떤 대사보다 선명하게 전해줬습니다. 일제강점기, 말을 빼앗긴다는 것의 의미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의 탄압이라 하면 토지 수탈이나 강제 징용을 먼저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제가 영화를 보면서 새삼 실감한 건, 언어를 빼앗는 것이야말로 가장 교묘하고 잔인한 방식의 지배였다는 점입니다.1930~40년대 일본은 이른바 민족말살통치를 내세웠습니다. 여기서 민족말살통치란 조선인의 언어·이름·문화를 강제로 일본식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