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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를 떠올릴 때 독립운동가만 생각해 왔다면, 사실 우리가 놓친 이야기가 훨씬 많습니다. Apple TV+ 드라마 '파친코'는 항쟁이나 영웅 서사가 아닌, 그 시대를 그냥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저도 처음엔 '또 다른 일제 강점기 드라마겠지'라고 가볍게 생각했는데, 다 보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있었습니다. 그 평범함이 오히려 더 무겁게 마음에 남았거든요.

우리가 정말 몰랐던 재일교포의 삶
솔직히 고백하면, 저는 재일교포(在日僑胞)라는 단어를 들으면 막연하게 '일본에 사는 한국 사람'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재일교포란 일제 강점기 이후 일본에 정착하게 된 한국인 및 그 후손을 의미하는데, 그 시작이 자발적 이민이 아닌 강제 노역과 생존을 위한 탈출이었다는 사실을 드라마를 통해 제대로 마주하게 됐습니다.
드라마 속 선자의 가족이 오사카 이쿠노구에 정착하는 장면은 단순한 배경 묘사가 아닙니다. 이쿠노구의 쓰루하시 지역은 실제로 코리아타운이 형성된 곳으로, 수십 년에 걸쳐 조선인들이 뿌리를 내린 역사적 공간입니다. 드라마는 이 공간에 제주도의 풍속과 음식, 언어를 촘촘하게 녹여 넣으며 재일교포 사회가 얼마나 절박하게 정체성을 지키려 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제가 특히 마음에 걸렸던 장면은 할머니가 된 선자가 초등학교 졸업장을 꺼내 보이는 부분이었습니다. "세상에서 나만 동떨어져 있는 기분"이라는 그 대사 한 마디가, 수십 년을 이국땅에서 버텨온 사람이 가진 고독감을 아주 정확하게 찌릅니다. 화려한 독립운동 서사보다 이 장면 하나가 훨씬 오래 남았습니다.
관동대지진, 그리고 지워진 학살
드라마에서 관동대지진(關東大震災) 장면은 꽤 충격적으로 다가옵니다. 1923년 9월, 진도 7.9의 지진이 요코하마와 도쿄 일대를 덮쳤고 1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이 재앙보다 더 충격적인 건 그 이후에 벌어진 일입니다. 당시 일본 당국과 자경단(自警團)은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 "조선인이 방화를 저질렀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고, 이에 선동된 군중이 재일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했습니다. 여기서 자경단이란 지역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결성한 치안 조직을 말하는데, 이 경우엔 혐오 범죄의 실행 도구가 됐습니다.
역사학자들은 당시 희생자 수가 수천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합니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그런데 일본 측 공식 기록에는 사망자가 단 40명으로 기재돼 있습니다. 드라마는 이 숫자를 직접 언급하며 역사 왜곡의 실태를 고발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에서 분노보다 무력감이 먼저 왔습니다. 기록이 지워지면 죽음도 없었던 일이 되는구나 싶어서요.
한수가 아버지의 죽음 이후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은, 그 모든 혼란과 공포를 직접 겪은 뒤 살아남은 자의 눈빛을 담고 있습니다. 그 눈빛이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이유가 바로 이 학살에 있다는 것을 드라마는 굳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보는 사람이 직접 느끼도록 연출해 뒀기 때문입니다.
- 1923년 관동대지진: 진도 7.9, 사망자 10만 명 이상
- 지진 직후 유언비어를 이용한 조선인 학살 자행
- 역사학자 추정 희생자: 수천 명 / 일본 공식 기록: 40명
- 드라마는 이 수치를 직접 자막으로 제시하며 역사 왜곡을 고발
간첩 조작, 조국이 가한 두 번째 배신
파친코를 보면서 제가 가장 오래 생각했던 부분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일본에서 차별과 멸시를 견디며 살아온 재일교포들에게, 정작 조국은 무엇을 했는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드라마를 계기로 알게 된 사실인데, 과거 군부 독재 시절 한국 정부는 반공(反共)을 국가 통치의 핵심 명분으로 삼으며 재일교포들을 간첩으로 조작하는 사건을 반복했습니다. 간첩 조작이란 실제 간첩 활동이 없었음에도 허위 자백과 증거 조작으로 개인을 국가보안법 위반자로 만들어 처벌하는 국가 범죄를 말합니다. 연좌제(連坐制)라는 제도까지 동원됐는데, 이는 본인의 죄가 아닌 가족·친척의 혐의로 인해 당사자도 불이익을 받는 제도입니다. 재일교포 한 명이 간첩으로 몰리면 한국에 있는 가족 전체의 삶이 무너지는 구조였습니다(출처: 국가인권위원회).
저는 이 사실을 접했을 때 솔직히 분노보다 부끄러움이 먼저 들었습니다. 일본의 핍박을 피해 살아남은 사람들을 우리 손으로 다시 죽인 거잖아요. 추성훈 선수 이야기가 그 상징처럼 보였습니다.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유도 결승에서 금메달을 딴 재일교포 출신 선수에게 한 신문이 '조국을 메쳤다'는 제목을 달았을 때, 그게 우리 사회가 재일교포를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거였습니다. 그 선수가 결국 일본으로 귀화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우리가 먼저 만들어놓은 겁니다.
그래도 살아냈다는 것, 파친코가 말하려는 것
드라마 제목인 '파친코'는 단순한 게임 기계가 아닙니다. 파친코(パチンコ)란 일본의 핀볼식 도박 기계로, 재일교포 상당수가 생계 수단으로 이 산업에 종사해야 했던 현실을 상징합니다. 일본 주류 사회에서 정규직을 얻기 어려웠던 조선인들에게 파친코 업소 운영은 몇 안 되는 자립 수단이었지만, 동시에 사회적 낙인이기도 했습니다. 드라마는 이 이중성을 제목 하나에 집약시켜 놓은 겁니다.
제가 드라마를 보면서 인상 깊었던 건 선자라는 인물이 어떤 영웅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녀는 옳지 않은 선택을 한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채 이국땅으로 건너가고, 시어머니에게 인정받지 못하면서도 버팁니다. 빚을 갚기 위해 한수에게 받은 시계를 팔 때 흥정을 포기하지 않는 그 장면, 아버지 시장에서 배운 생존 감각이 몸에 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솔로몬이 회사에서 해고된 뒤 넥타이를 던져버리는 장면은, 도쿠주마루에서 여인이 바다에 몸을 던지던 장면과 의도적으로 교차됩니다. 세대를 넘어 같은 "한(恨)"이 이어진다는 연출입니다. 여기서 한이란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억울함·체념·그래도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뒤엉킨 감정으로, 외국어로 번역이 거의 불가능한 우리 고유의 정서 개념입니다. 그 감정이 피 속에 새겨져 세대를 건너 전달된다는 걸, 드라마는 대사보다 연출로 설명합니다.
제 경험상 이런 드라마는 다 보고 나서 '좋았다'보다 '무거웠다'가 먼저 나옵니다. 파친코가 바로 그랬습니다. 그 무거움이 진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파친코 드라마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건가요?
A. 재일교포 작가 이민진이 쓴 동명 소설이 원작입니다. 특정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것은 아니지만, 재일교포 커뮤니티의 실제 역사와 경험을 세밀하게 반영했습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강제 노역 등은 모두 역사적으로 기록된 사건입니다.
Q.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이 얼마나 희생됐나요?
A. 역사학자들은 수천 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하지만, 일본 측 공식 기록에는 40명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이 수치 간의 간극 자체가 역사 왜곡의 증거로 지금도 논쟁 중인 사안입니다.
Q. 재일교포 간첩 조작 사건이 실제로 있었나요?
A. 네, 실제로 있었습니다. 군부 독재 시절 국가보안법을 악용해 재일교포를 간첩으로 조작한 사건이 다수 발생했고, 이후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연좌제로 인해 피해가 가족 전체로 번진 사례도 많았습니다.
Q. 파친코 드라마는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Apple TV+에서 스트리밍 서비스 중입니다. 시즌 1은 2022년에 공개됐고, 여러 국제 시상식에서 연기상과 작품상 후보에 오른 바 있습니다. 한국어·일본어·영어가 혼용되는 구성이 특징입니다.
결론
파친코를 다 보고 나서 제가 느낀 건 단순한 감동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역사'라고 부르면서 정작 그 안에서 살아간 가장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외면해 왔다는 불편한 자각이었습니다.
일본의 핍박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재일교포에게 두 번째 상처를 입힌 건 우리 자신이었습니다. 추성훈 선수 사례처럼 우리 스스로 선을 긋고 그들을 이방인으로 만든 것도 사실입니다. 드라마는 그 불편한 진실을 선자와 솔로몬의 이야기로 아주 천천히, 그러나 정확하게 짚어냅니다.
이 드라마를 보지 않으신 분이라면 역사 공부 목적으로라도 한 번 보시길 권합니다. 그리고 보고 나서 '우리가 그들에게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한 번쯤 스스로에게 물어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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