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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박열' 리뷰 (아나키즘, 관동대학살, 독립운동가)

필름아카이브 2026. 7. 23. 00:31

목차


    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 단 3일 만에 무고한 조선인 6천 명 이상이 학살당했습니다. 이 참혹한 사실을 영화 <박열>을 보고 나서야 제대로 마주했을 때, 솔직히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죄수복 대신 조선의 관복을 입고 법정에 당당히 걸어 들어간 스물두 살 청년의 이야기, 지금 꺼내봅니다.

     

    영화 '박열' 포스터
    영화 '박열'은 아나키스트 박열 의사의 독립 운동 이야기입니다.

    아나키즘과 불령사 — 괴짜 청년이 꿈꾼 것

    영화를 보기 전까지 저는 아나키스트 하면 긴 바바리코트에 권총을 든 음울한 테러리스트를 떠올렸습니다. 그만큼 아나키즘(Anarchism)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던 거죠. 여기서 아나키즘이란 국가 권력과 일체의 강제적 지배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와 자율적 연대를 최고 원칙으로 삼는 사상입니다. 쉽게 말해 "죄 없는 민중을 억누르는 모든 권력에 저항한다"는 신념인 셈입니다.

    박열은 바로 그 신념 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아나키스트 동료들과 함께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했는데, '불령(不逞)'이란 일본 제국주의가 저항하는 조선인을 비하해 부르던 표현이었습니다. 박열은 그 경멸의 단어를 되레 자신들의 이름으로 뒤집어 썼습니다. 그 배짱 하나만으로도 이미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불령사의 가장 큰 목표는 황태자 암살 계획이었습니다. 물론 폭탄을 구할 자금도, 제조 능력도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 계획 자체가 박열이 단순한 몽상가가 아니라 실천하는 사람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지점에서 그의 연인이자 동지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가 등장합니다. 조선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녀는 일본인이었음에도 조선의 독립을 자신의 일처럼 여겼고, 박열 못지않은 강단으로 함께 싸웠습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예상 밖으로 강렬한 인상을 받은 인물이 바로 후미코였습니다. 묘하게 매력 있다는 표현이 딱 맞았습니다.

    • 아나키즘: 모든 강제적 국가 권력에 저항하는 사상으로, 박열과 불령사의 행동 원칙이 됨
    • 불령사: 박열이 일본에서 조직한 아나키스트 단체. '불령'은 일제가 저항 조선인을 경멸하며 부른 표현을 역이용한 이름
    • 가네코 후미코: 박열의 연인이자 동지. 훗날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두 번째 일본인
    요약: 아나키즘이라는 확고한 신념 위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불령사를 통해 일본 제국주의에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관동대학살과 대역죄 — 당당함이 훈장이 되다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관동) 지역을 강타한 관동대지진(関東大地震)은 사망자만 10만 명 이상을 기록한 전대미문의 재앙이었습니다(출처: 국가기록원). 여기서 관동대지진이란 1923년 9월 규모 7.9의 강진으로 도쿄와 요코하마 일대를 초토화시킨 사건을 말합니다. 문제는 그 이후였습니다.

    혼란에 빠진 일본 정부는 민심을 돌릴 희생양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이 꺼내든 카드가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거짓 유언비어였습니다. 이 발표 하나로 자경단(自警團)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3일 만에 6천 명 이상의 조선인이 살해됐습니다. 이것이 바로 관동대학살입니다. 여기서 자경단이란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민간 경비 조직인데, 이 사건에서는 조선인 학살의 실행 도구로 변질됐습니다. 영화에서 이 장면을 보는 내내 처참한 심정이었고, '나라 잃은 설움'이라는 말이 단순한 관용구가 아님을 비로소 실감했습니다.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오자 당황한 일본 정부는 이번엔 더 큰 제물을 찾았습니다. 그 표적이 박열이었습니다. 정부는 그에게 대역죄(大逆罪)를 씌웠는데, 대역죄란 황실이나 국가 원수를 해치려 한 죄로 당시 일본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가장 무거운 죄목이었습니다. 그런데 박열의 반응이 놀라웠습니다. 그는 스스로 황태자 암살 계획을 시인하며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동지들 전체가 연루되는 것을 막기 위해 혼자 제물이 되기로 한 선택이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박열은 일본 법원에 요청했습니다. 조선 민족을 대표해 이 자리에 섰으니, 죄수복이 아닌 조선의 관복을 입겠다고요. 그 요청이 받아들여졌고, 박열과 후미코는 조선의 옷을 입고 당당히 법정에 걸어 들어갔습니다. 법정에서 찍힌 두 사람의 사진은 실제 역사 기록으로 남아 있으며(출처: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그 표정에서는 죽음 앞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은 괴짜 독립운동가의 면모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제가 직접 그 사진을 확인했을 때, 영화가 과장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됐습니다.

    요약: 관동대학살이라는 국가 범죄 앞에서도 박열은 대역죄를 훈장으로 받아들이며 조선인의 자긍심을 법정에서 온몸으로 증명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박열 의사는 실제로 사형을 받았나요?

    A. 처음에는 대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22년 넘게 복역하다가 1945년 해방 직후 출소했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그의 신념이 꺾이지 않았다는 점이, 단순한 영화 속 영웅이 아닌 실존 인물로서 더욱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Q. 가네코 후미코는 왜 일본인인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나요?

    A. 그녀는 조선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며 일제 강점의 실상을 직접 목격했고, 이후 아나키즘과 조선 독립운동에 자발적으로 투신했습니다. 단순한 동조가 아닌 주체적인 실천이 인정되어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두 번째 일본인이 됐습니다. 국적보다 신념이 먼저였던 사람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더 인상 깊지 않으신가요?

     

    Q. 관동대학살 당시 조선인은 왜 그렇게 많이 희생됐나요?

    A. 일본 정부가 지진으로 인한 사회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퍼뜨렸고, 이에 자경단이 조직적으로 조선인을 학살했습니다. 국가가 만들어낸 거짓말이 6천 명의 생명을 앗아간 것입니다. 나라의 보호를 받지 못했던 식민지 백성의 현실이 얼마나 참담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Q. 박열 의사는 해방 이후 어떤 활동을 했나요?

    A. 출소 후 박열 의사는 일본에서 재일조선인 사회를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김구 선생의 부탁으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고국으로 봉환하는 일을 직접 책임지기도 했습니다. 영화에서는 다루지 않은 이 후일담이, 제가 박열 의사를 더 깊이 찾아보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결론

    영화 한 편이 역사 한 페이지를 살려낸다는 말이 이렇게 실감 나게 와 닿은 적이 없었습니다. 박열 의사를 몰랐다면, 불령사를 몰랐다면, 관동대학살의 구체적인 숫자를 이렇게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우리 역사 속에는 아직 이름조차 제대로 불리지 못하는 독립운동가들이 훨씬 많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그 이름들을 지워지지 않게 붙잡아 두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박열 의사의 이야기는 "어떻게 싸울 것인가"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도 웃음과 당당함을 잃지 않은 그 태도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한 메시지로 남아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관동대학살에 관심이 생기셨다면 영화 <박열>을 꼭 한 번 직접 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nrY5BG0nGc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