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를 떠올릴 때 독립운동가만 생각해 왔다면, 사실 우리가 놓친 이야기가 훨씬 많습니다. Apple TV+ 드라마 '파친코'는 항쟁이나 영웅 서사가 아닌, 그 시대를 그냥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저도 처음엔 '또 다른 일제 강점기 드라마겠지'라고 가볍게 생각했는데, 다 보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있었습니다. 그 평범함이 오히려 더 무겁게 마음에 남았거든요. 우리가 정말 몰랐던 재일교포의 삶솔직히 고백하면, 저는 재일교포(在日僑胞)라는 단어를 들으면 막연하게 '일본에 사는 한국 사람'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재일교포란 일제 강점기 이후 일본에 정착하게 된 한국인 및 그 후손을 의미하는데, 그 시작이 자발적 이민이 아닌 강제 노역과 생존을 위한 탈출이었다는 사실을 드라마..
매년 광복절마다 저는 이상하게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올해는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을 다 보고 난 뒤라 그 먹먹함이 좀 더 오래갔습니다. 유진 초이라는 인물이 허구임을 알면서도, 황기환 지사 같은 실존 인물이 떠올라 꽤 오래 멍하니 있었거든요. 1900년대 초 조선의 이야기를 담은 이 드라마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 데이터와 역사적 맥락을 놓고 솔직하게 정리해봤습니다. 미스터 선샤인이 그린 시대, 얼마나 정확한가드라마는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부터 1907년 군대 강제 해산까지를 배경으로 합니다. 신미양요란 미국이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강화도를 침공한 사건으로, 조선이 외세와 처음으로 대규모 무력 충돌을 벌인 역사적 분기점입니다. 극 중 어린 유진이 이 전투 한복판에서 살아남아 미국..
내 아이를 위해 산 물건이 아이를 죽였다면, 부모로서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영화 '공기살인'은 실제로 있었던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첫째 아이를 낳고 가습기를 장만했던 저로서는 이 영화가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1994년부터 2011년 사이였다면, 저 역시 아무 의심 없이 그 살균제를 사용했을 것이 분명하니까요. 가습기 살균제가 폐를 굳힌 원리, 영화는 어떻게 보여줬나영화는 한 아이가 수영 중 갑자기 쓰러지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평소 몸이 약해 결석이 잦았던 민우가 수영장에서 팔다리를 굳힌 채 가라앉는 장면, 그 짧은 장면 하나가 이후 두 시간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아들의 폐 엑스레이를 들여다본 아버지이자 의사인 태우는 처음에 원..
솔직히 저는 이 드라마를 보기 전까지 촉법소년 문제가 이렇게 심각한지 몰랐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동네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중학생 절도 사건이 터졌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뭔가 찜찜하다고만 생각했는데, 넷플릭스 소년심판을 보고 나서야 그 찜찜함의 정체를 제대로 마주하게 됐습니다. 드라마가 허구라지만, 극 중 사건들은 실제 판결 기록을 참고해 구성된 만큼 현실과 픽션의 경계가 무척 얇습니다. 촉법소년 제도, 드라마가 보여준 현실일반적으로 소년법은 미성숙한 아이들에게 교화의 기회를 주기 위한 제도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저 역시 그렇게만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소년심판을 보면서 그 전제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드라마 첫 화부터 등장하는 장면이 강렬합니다. 만 14세 미만 소년이 초등학생을 목 졸라 살해하고 ..
만약 제가 하지도 않은 살인의 대가로 15년을 감옥에서 보냈다면 어떨까요. 영화 '재심'을 보는 내내 그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실제로 일어난 약촌 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강압수사로 범인을 만들어내고 조작된 증거로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꺾었던 우리 사법의 어두운 시절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조작수사, 어떻게 한 사람을 살인범으로 만드는가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엔 '설마 이 정도까지'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사건의 전말을 따라가다 보니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단순히 나쁜 형사 한 명이 아니라, 시스템 전체가 한 청년을 범인으로 찍어내는 방식으로 굴러갔거든요.영화 속 강력팀 팀장 철기는 오토바이 사고 현장에서 목격자 신분이던 현우를..
1986년 경기도 화성, 10명의 여성이 연쇄 살인마에게 희생됐고 사건은 33년간 미제로 남아 있었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은 바로 그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저도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면서 이 사건을 접할 때마다 "왜 아직도 못 잡았지?"라는 답답함이 가슴을 눌렀는데, 그 감정이 이 영화와 정확히 맞닿아 있었습니다. 진범 '이춘재'가 검거된 시점에 다시 본 '살인의 추억'은 예전과는 다르게 다가 왔습니다. 수사기법 — 직감과 논리 사이, 그 처절한 간극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게 실화 기반이라고?"였습니다. 범죄수법, 수사 과정, 심지어 증거 부재 상황까지 당시 기록과 너무나 흡사하게 묘사돼 있어서 단순한 범죄 영화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영화 속 두 형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