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그때 그 선택만 없었더라면"이라는 생각이 문득 치고 올라올 때가 있습니다. 저도 몇 년 전 돌이키기 어려운 결정을 하고 나서 한동안 그 생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1999년 작 영화 은 바로 그 감정을 정면으로 건드립니다. 기차를 향해 "나 다시 돌아갈래"를 절규하는 장면은 우리나라 영화계의 역사적인 명장면으로 손꼽히며 이 장면 하나로, 영화가 끝난 뒤에도 며칠 동안 머릿속에서 그 장면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역순 구성이 '후회'라는 감정을 완성하는 방식영화는 2000년 현재의 김영호(설경구)가 강물에 뛰어들어 통곡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소풍 나온 사람들 속에서 홀로 절규하는 그 모습은 처음에는 그냥 이상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영화가 역순 구성, 즉 미래에서 과..
내 카카오톡 대화가 누군가에게 열람된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저는 몇 년 전 카카오톡 민간인 사찰 뉴스를 접했을 때 그 불쾌함과 두려움이 오래 남았습니다. 2011년 개봉한 영화 은 바로 그 경험을 1990년대 초반으로 끌어당겨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국군보안사령부가 천 명이 넘는 민간인을 조직적으로 감시한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보면서 내내 '이게 정말 불과 30년 전 이야기구나' 싶어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민간인 사찰, 영화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영화 은 허먼 멜빌의 해양 소설 제목을 차용했습니다. 거대하고 실체 없는 괴물을 쫓는다는 의미인데, 영화 속 기자들이 추적하는 대상이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권력 집단, 즉 '정부 위의 정부'가 언론·정계·사법부를 ..
솔직히 저는 황우석 박사 사건이 터졌을 때, 처음엔 제보자 쪽이 틀렸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러길 바랬습니다. 군 복무 중 야간 당직을 서다 우연히 틀어놓은 TV에서 "논문 사진이 조작됐다"는 뉴스가 흘러나왔을 때, 저는 그게 설마 사실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영화 '제보자'는 바로 그 사건의 이면, 즉 진실을 세상에 꺼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무너질 뻔했는지를 담고 있습니다. 언론사명감, 말은 쉽고 현실은 다릅니다일반적으로 언론인은 진실을 좇는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그리고 제 경험상 뉴스를 오래 지켜보면서 느낀 건 그게 얼마나 이상적인 말인지입니다.영화 속 윤민철 PD(박해일 역)는 불법 난자 매매 제보를 시작으로 이장환 박사의 줄기세포 논문 조작 의혹으로 파고..
현존하는 약 3,000개 언어 중 고유의 사전을 보유한 언어는 단 20여 개뿐입니다. 그 목록에 한국어가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제 가슴속에는 자부심이 가득차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영화 를 보고 나서였습니다. 이 숫자 하나가 우리말을 지키려 했던 분들의 무게를 그 어떤 대사보다 선명하게 전해줬습니다. 일제강점기, 말을 빼앗긴다는 것의 의미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의 탄압이라 하면 토지 수탈이나 강제 징용을 먼저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제가 영화를 보면서 새삼 실감한 건, 언어를 빼앗는 것이야말로 가장 교묘하고 잔인한 방식의 지배였다는 점입니다.1930~40년대 일본은 이른바 민족말살통치를 내세웠습니다. 여기서 민족말살통치란 조선인의 언어·이름·문화를 강제로 일본식으로 ..
12척으로 330척을 상대했다는 말, 사실 처음엔 좀 과장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영화 명량을 보고 나서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 조선 수군이 칠천량 전투에서 거의 궤멸된 직후 벌어진 명량 해전. 승산이 없는 게 아니라 아예 말이 안 되는 싸움이었습니다. 그 극단적인 상황을 충무공 이순신이 어떻게 뒤집었는지, 단순한 영웅담이 아니라 전략과 리더십의 관점에서 짚어봤습니다. 명량 해전, 숫자가 보여주지 못한 것들저는 어릴 때부터 이순신 장군이 '위대한 장군'이라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자랐습니다. 교과서에도 나오고, 위인전도 읽었으니까요. 그런데 막상 명량을 보면서 처음으로 '이 사람이 그 순간 어떤 심정이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영웅이라는 타이틀 뒤에 가려진 고뇌가 처음으..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서 며칠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는데, 변호인이 딱 그랬습니다. 부림사건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을 때 저는 그게 실제 역사라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죄가 없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고문하고, 읽어도 되는 책을 이유로 감옥에 가두는 일이 불과 몇십 년 전 이 땅에서 버젓이 벌어졌다는 사실. 그 충격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지만 포기하지 않았던 바보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부림사건, 조작된 공안의 실체변호인은 1981년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실제로 일어난 부림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입니다. 부림사건이란 부산 지역 학생과 사회인들이 독서 모임을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뒤집어쓰고 영장도 없이 체포, 감금, 고문을 당한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