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학년, 강원도 평창 수련회에서 처음 트루먼 쇼를 봤습니다. 그때 느낀 건 단순한 영화적 감동이 아니었습니다. 진로도 모르고, 공부는 왜 해야 하는지도 몰랐던 그 시절의 저와 트루먼이 묘하게 겹쳐 보였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영화가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건, 아마 그 때문일 겁니다. 평창 수련회에서 처음 본 트루먼 쇼1998년 개봉한 트루먼 쇼는 태어나면서부터 리얼리티 쇼(Reality Show)의 주인공으로 설정된 남자, 트루먼 버뱅크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리얼리티 쇼란 일반인의 실제 일상을 가감 없이 촬영해 방송하는 프로그램 형식을 말하는데, 이 영화에서는 한 발 더 나아가 주인공 자신만 그 사실을 모른다는 설정이 핵심입니다.트루먼이 사는 씨헤이븐(Seahaven)은 달에서도..
내 아이를 위해 산 물건이 아이를 죽였다면, 부모로서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영화 '공기살인'은 실제로 있었던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첫째 아이를 낳고 가습기를 장만했던 저로서는 이 영화가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1994년부터 2011년 사이였다면, 저 역시 아무 의심 없이 그 살균제를 사용했을 것이 분명하니까요. 가습기 살균제가 폐를 굳힌 원리, 영화는 어떻게 보여줬나영화는 한 아이가 수영 중 갑자기 쓰러지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평소 몸이 약해 결석이 잦았던 민우가 수영장에서 팔다리를 굳힌 채 가라앉는 장면, 그 짧은 장면 하나가 이후 두 시간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아들의 폐 엑스레이를 들여다본 아버지이자 의사인 태우는 처음에 원..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그저 '어른들의 어려웠던 시절'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였던 탓에 뉴스 화면 속 낯선 경제 용어들이 무섭게 느껴졌던 감각만 남아 있었을 뿐이었는데, 이제 어른이 된 지금 영화 한 편이 그 기억을 완전히 다른 온도로 되살려 놓았습니다. IMF 외환위기,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론 몰랐던 것들많은 분들이 IMF 외환위기(1997년 한국 외화 유동성 위기)를 "IMF 때문에 나라가 망할 뻔했다"고 기억합니다. 저도 오랫동안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IMF는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으로, 쉽게 말해 달러가 급히 필요한 나라에 돈을 빌려주는 글로벌 공공 ..
솔직히 저는 황우석 박사 사건이 터졌을 때, 처음엔 제보자 쪽이 틀렸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러길 바랬습니다. 군 복무 중 야간 당직을 서다 우연히 틀어놓은 TV에서 "논문 사진이 조작됐다"는 뉴스가 흘러나왔을 때, 저는 그게 설마 사실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영화 '제보자'는 바로 그 사건의 이면, 즉 진실을 세상에 꺼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무너질 뻔했는지를 담고 있습니다. 언론사명감, 말은 쉽고 현실은 다릅니다일반적으로 언론인은 진실을 좇는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그리고 제 경험상 뉴스를 오래 지켜보면서 느낀 건 그게 얼마나 이상적인 말인지입니다.영화 속 윤민철 PD(박해일 역)는 불법 난자 매매 제보를 시작으로 이장환 박사의 줄기세포 논문 조작 의혹으로 파고..
12척으로 330척을 상대했다는 말, 사실 처음엔 좀 과장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영화 명량을 보고 나서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 조선 수군이 칠천량 전투에서 거의 궤멸된 직후 벌어진 명량 해전. 승산이 없는 게 아니라 아예 말이 안 되는 싸움이었습니다. 그 극단적인 상황을 충무공 이순신이 어떻게 뒤집었는지, 단순한 영웅담이 아니라 전략과 리더십의 관점에서 짚어봤습니다. 명량 해전, 숫자가 보여주지 못한 것들저는 어릴 때부터 이순신 장군이 '위대한 장군'이라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자랐습니다. 교과서에도 나오고, 위인전도 읽었으니까요. 그런데 막상 명량을 보면서 처음으로 '이 사람이 그 순간 어떤 심정이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영웅이라는 타이틀 뒤에 가려진 고뇌가 처음으..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남산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게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수십 번은 남산을 오갔을 텐데도요. 영화〈하얼빈〉을 보고 나서야 다시 그곳을 찾아갔고, 여러번 방문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였지만 감회가 달랐습니다. 단순한 영화 리뷰가 아니라,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역사적 맥락 — 안중근을 둘러싼 엇갈린 시선영화 〈하얼빈〉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안중근 의사를 영웅으로만 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 불편함이 낯설었습니다.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신화산 전투 이후 포로 석방 장면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만국공법(萬國公法)에 근거해 일본군 포로를 풀어줍니다. 여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