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 영화를 꽤 많이 봐온 편인데, 2003년작 영화 '아이덴티티'만큼 두 번째 볼 때 완전히 다른 영화처럼 느껴지는 작품은 드물었습니다. 폭우 속 모텔에 고립된 사람들이 하나씩 죽어나가는 설정인데, 그 안에 숨겨진 반전이 제목 '아이덴티티(Identity, 정체성)'와 정확히 맞물리는 순간의 서늘함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폭우 속 모텔, 그리고 연쇄살인의 시작 — 줄거리영화는 두 개의 공간에서 동시에 진행됩니다. 한쪽에서는 살인범 말콤의 재판이 열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어느 폭우 치는 밤, 우연히 한 허름한 모텔에 모이게 된 11명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시작은 이렇습니다. 여배우를 태운 리무진 기사 에덴이 승객의 휴대폰 배터리를 찾아주다가 부주의로 한 여성을 치는 사고를 냅니다. 그 여성의 남편 에드는 ..
솔직히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저는 단순한 재난 액션물이겠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끝나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변종 연가시라는 기생충 하나가 사회 구조 전체를 건드리는 방식이, 코로나19와 옥시 사태를 직접 겪어온 저한테는 그냥 스크린 속 이야기로 넘길 수가 없었거든요. 변종 연가시, 어떻게 인간을 숙주로 삼는가연가시는 원래 사마귀나 메뚜기 같은 육식성 곤충을 숙주로 삼는 사상충입니다. 여기서 사상충이란 실처럼 가늘고 긴 형태의 기생성 선형동물을 의미하는데, 숙주의 몸 안에서 영양분을 빼앗으며 성장하다가 산란기가 되면 숙주의 뇌 신경을 직접 자극해 물속으로 뛰어들게 만드는 방식으로 번식합니다.영화 속 변종 연가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갑니다. 포유류, 나아가 인간까지 숙주로 삼을 ..
학교 다닐 때 반에 한 명쯤은 있었습니다. 혼자서 뭔가를 끄적이고, 선생님 질문엔 혼자만 아는 답을 말하는데, 정작 쉬는 시간엔 아무도 곁에 없는 그 아이. 저도 그런 친구를 옆에서 지켜본 적이 있는데, 솔직히 당시엔 "왜 저렇게 굴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을 보고 나서야 그 아이가 생각났습니다. 천재성과 사회성이 충돌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그리고 결국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이 영화는 아주 날카롭게 보여줍니다. 천재성, 혼자선 아무것도 못 한다1939년, 영국 블레츨리 파크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로라하는 인재들이었습니다. 언어학자, 수학자, 체스 챔피언까지. 하지만 그 안에서도 앨런 튜링은 유독 겉돌았습니다. 그는 팀원들이 수작업으로 암호를 해독하려 애쓰는 동안 혼자 ..
스포츠 영화는 약자가 이긴다는 결말을 이미 알면서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약자의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면, 감동의 무게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영화 '리바운드'는 폐부 직전의 부산 중앙고 농구부가 전국대회 결승까지 오른 실화를 담은 작품입니다. 저도 처음 이 이야기를 접한 건 웹툰 '가비지 타임'을 통해서였는데, 영화로 다시 만나니 그 감동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해졌습니다. 언더독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팀이 있다면농구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이야기입니다. 명문 농구 고등학교였던 부산 중앙고가 선수 수급도 안 되고, 제대로 된 코치조차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는 것. 일반적으로 그런 팀은 그냥 조용히 해체 수순을 밟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언더독(und..
전사한 군인의 유해가 고향 땅을 밟는 그 순간, 공항 전체가 멈춥니다. 영화 '챈스 일병의 귀환'을 보면서 저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군복무 시절 밤샘 근무를 하며 중얼거렸던 군가 한 소절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부모 형제 나를 믿고 밤잠을 이룬다.'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걸, 이 영화는 아주 조용하게, 그러나 깊게 일깨워 줍니다. 챈스 일병의 귀환, 어떤 영화인가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이라크에서 전사한 해병대 일병 챈스 러셀 펠프스의 유해를 고향인 와이오밍주 뒤부아까지 운구하는 여정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마이크 스트로블 대령이 자원하여 호송관(Escort Officer)을 맡으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여기서 호송관이란, 전사한 장병의 유해가 가족의 품에 안길..
솔직히 저는 영화 '아일라'를 몰랐습니다. 한국전쟁을 다룬 콘텐츠라면 빠짐없이 챙겨본다고 자부했는데, 터키에서 역대 5위 흥행을 기록한 이 영화를 이제서야 알았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1950년 한반도에서 시작된 터키 군인 슐레이만과 전쟁고아 소녀 아일라의 이야기, 그것도 60년 만에 재회하는 실화라는 걸 알고 나서는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한국전쟁과 터키 군인 슐레이만의 선택6·25 한국전쟁(Korean War)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동족상잔의 비극입니다. 여기서 동족상잔(同族相殘)이란 같은 민족끼리 서로를 죽이는 참혹한 상황을 가리키는 말로, 이 전쟁이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겼는지를 단 네 글자로 압축합니다. 저는 이 땅에서 불과 70여 년..